“어 이게 지금도 나오네?”
커피를 사러 들어간 편의점에서 그녀가 놀랜듯 말한다. 서주 아이스바. 어울리지 않는 아이보리 봉지 속에 촌스런 오렌지색 아이스바. 일명 하드.
“이걸 너도 알아?”
되려 내가 놀라 묻는다. 이걸 그녀 나이 때도 즐겨 먹었었나? 궁금해진다. 난 저걸 보면 형식이 녀석 생각이 난다. 왜놈이 세운 학교는 보내지 않으리라던 청백리 할아버지 때문에 ‘국민’학교를 늦게사 졸업한 아버지는, 언제고 어르신 그 강단에 화를 면키 어려우리라 주위 어른들이 말하던 바대로 해방되기 전 온집안이 풍비박산나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칠곡 그 시골까지 내려오신 분이었다. 배운건 사서와 삼경인데 세상은 변해 할 수 있는거라곤 소작농이 전부였으나 호랑이 조부께 배운그대로 양반의 기세는 꺾이지 않던 분이라, 밤만되면 나를 앉혀놓고 족보를 읊으시는게 하나의 낙이라면 낙이셨다. “너는 곡산한씨 제양군 생원공파 34세손이다. ‘무’字 할아버지 아래로 여섯아들이 있었는데… ” 로 시작하는 일대기를 듣고 있노라면 우리 집안의 기세는 감사가 부임해 오는 날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라는 다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와 급제정도는 내세우지도 못할 정도의 짱짱한 가문이라는 소위 ‘풍’으로 끝나곤 했지만 그 덕에 나는 뼈속 까지 양반집 자존심이 생겨버렸던 것 같다.
1.주인집 아들녀석은 형식이라고 하늘높은지 모르게 들린 코에 눈두덩은 한대 맞은것마냥 부어 외꺼풀인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있으면 당췌 자는 건지 나를 보는 건지 모르게 생긴 -놀부가 어릴때 그모습이었노라고 말하면 누구도 믿을만한- 표정을 가진 동갑내기 친구였다. 학교만 다녀오면 꼭 점빵에 들러 그 오렌지색 서주 아이스바를 사서 마당 평상에 앉아 보란듯이 핥아 먹곤 했었다. 그 나이대 애들이야 나도 한 입만 먹어보자 달려들기 바쁘겠지만 나는 제양군 생원공파 34세손으로써 어디 족보도 없는 상놈자식일지도 모르는 녀석에게 부탁을 할 리 없었으며 배를 곯아 죽으면 죽었지 쌀값을 묻지 않는 양반자제가 남이 먹는것을 탐내다니 가당키나 했을까 말이다. 예의 다른 친구들과 다르다는걸 알았는지 형식이 녀석은 언제나 내 가 집에 있을 때에만 에헴하고 나타나서 그 서주아이스바를 다 녹여먹을때까지 우리 방 창문 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제양군 생원공파 34세손이다. 내 언제고 저것을 얼어죽는 한이 있어도 배에 들어가는 한 먹어보리라’ 맹세하며 방구석에 앉아 다짐하던 때가 벌써 25년전 일이다.
2.기묘하게 자라버린 양반집 자존심은 사춘기 소년에게도 어김없었다. 깜보로 스타덤에 오른 박중훈이 입고나와 ‘방방’ 뜨면서 찍은 CF속의 ‘뱅뱅’을 사서 입고 와야만이 멋쟁이로 인정되던 시절, 학교만 끝나면 나도 한 번 입어보자며 졸라대던 애들이 한심하게 보이는건 당연히 제양군 생원공파 34세손이기 때문이었다. 주제가 아니면 넘보질 말아야 할 것은 비단 국어책만이 아님을 저치들은 모르는 걸까? 니것이 아닌것에 눈돌리지 않는 것이 선비정신의 기본이라고 귀가 양쪽으로 관통되도록 듣고 자란건 역시 뼈대있는 선비집안인 나뿐인가 싶었다.
3.걔가 너 좋아하는지 몰랐어? 정말? 고등학교시절 알만한 애들은 다 알았다는 정희의 짝사랑의 상대가 나였다는 걸 알게 되고 얼마나 지났을까. 반창회때 BMW 5시리즈를 몰고 나온 정희가 나를 태우고 간곳이 남산 타워 주차장이었다.
“운전… 해볼래?” “내가 왜?”
“넌 이차 몰아보고 싶지 않아?” “응”
“… 왜?” “니차니까…”
그렇게 싱겁게 끝난 대화가 여러남자를 후린 그녀의 대쉬였다는것을 늦게 나마 알게 된것도 내가 제양군 생원공파 34세손이기 때문이었다. 남의 물건에 내가 왜 손을 대냐 말이다. 양반집 자손이…
“오빠 피곤하지? 내가 운전할까?”
아까 사온 커피는 뒷전으로하고 한 참을 빨던 서주 아이스바도 이젠 다먹어 나무 막대기만 물고 있던 차에 그녀가 말한다.
“어? 뭐라고?”
“오빠 피곤할까봐.. 내가 운전할까?”
이제보니 내 차를 참 운전하고 싶어하는 그녀다. 처음 만난건 친구소개로 만나 대쉬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거절 당했었다. 인연이 아닌가 보다 싶었는데 몇 달전 우연히 다시 연락이 되어 만난 사람. ‘변호사 개업하셨다는 얘기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언제 식사한번 해요’ 난데 없는 SMS 에 나간 자리에 몇 달만에 보고 한다는 첫마디가 “차바꾸셨네요?” 였었다. 이제보니…
하긴 처음 만날때 내 차가 경차였구나. 나한테 바뀐건 명함과 차종 뿐인데 그녀의 태도도 이제보니 바뀌어 있었네. ‘내 생각해 주는건 고마운데 내 차가 예전 그 경차였어도 니가 지금 그 말을 하려나?’ 궁금해진다. 돌아보니 나를 보는 눈이 이상하게 형식이 녀석한테 붙어지내던 혜성이 같다. 형식이가 호혜의식처럼 내미는 침범벅이던 하드를 그리도 황공하게 두어번 핥던 혜성이…
“…나는 제양군 생원공파 34세..손..”
“뭐라고? 오빠 뭐라는거야?”
“…. 아냐. 아무것도. 근데 넌 본관이 어디야?”